
저번 시간에 다룬 1차 오일쇼크
1차 오일쇼크는 단순히 유가가 급등한 사건이 아니라 그 전까지 돈을 주고 사오면 된다고만 생각했던 원자재였던 석유가 산유국들의 정치적 무기로 사용돼 국가 안보, 외교, 산업 등 경제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 만들어졌고 기존에 유지되던 세븐시스터즈의 오일 카르텔이 붕괴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1차 오일쇼크에서부터 2차 오일쇼크까지 과정 중 각 국은 어떤 움직임들을 보였는지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다
- 일본 – 에너지 절약과 고효율 산업
당시 일본은 에너지 자급률이 매우 낮았고, 산업 생산의 대부분을 수입 석유에 의존하고 있었다. 일본은 석유가 없으면 공장도, 운송도, 수출산업도 제대로 돌아가기 어려운 구조였다
그런 상황에서 국제 유가가 4배 가까이 상승하자 일본 기업들의 생산비는 급격하게 올라 갔고 수출 경쟁력뿐만 아니라 내수 시장 역시 물가 상승으로 위축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에너지 절약 정책을 강화했고, 기업들은 생산 공정의 효율화를 위해 대규모 투자를 진행했다. 철강, 화학, 시멘트 같은 에너지 다소비 산업에서는 폐열 회수 시스템과 고효율 설비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공장에서 버려지는 열을 다시 활용하고, 같은 제품을 만들더라도 더 적은 에너지로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한 것이다.
도요타와 혼다 같은 일본 자동차 기업들은 연비가 좋은 소형차를 앞세워 오일쇼크 이후 미국 시장에서 빠르게 존재감을 키우기 시작했다
가전과 전자산업에서도 저전력, 고효율 제품 개발이 중요해졌다. 소니, 파나소닉 같은 일본 기업들은 에너지 효율이 좋은 제품을 만들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했다.
결국 일본은 오일쇼크를 통해 산업 구조를 한 단계 고도화했고 석유에 취약한 산업 구조에서 벗어나 에너지 효율이 높고 기술집약적인 산업으로 이동해 일본 제조업이 세계 시장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추후에 더 다룰 예정이지만 이후 1980년대 일본 제조업의 전성기를 누렸고 1985년 플라자 합의를 겪고 난 후 흔히 얘기하는 잃어버린 20년이라 불리는 긴 침체를 겪게 된다.
- 영국 – 북해 유전 개발
영국은 일본과는 다른 방식으로 오일쇼크에 대응했다. 영국이 주목한 것은 바로 북해 유전이었다.
사실 북해 유전 개발은 오일쇼크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1차 오일쇼크 이후 북해 유전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에는 경제적 가치가 있는 에너지 자원이었다면, 오일쇼크 이후에는 중동 석유 의존도를 낮출 수 있는 전략 자산이 되었다.
영국 입장에서 북해 유전 사업은 에너지 안보를 확보하고, 국제 유가 급등 속에서 외부 충격을 줄일 수 있는 국가적인 프로젝트로 진행됐다.
북해 유전 개발은 영국 경제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석유 개발 과정에서 해양 시추 기술과 관련 공학 기술이 발전됐고, 이는 영국 기업들이 해양 에너지 개발 분야에서 기술력을 축적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북해 유전에서 나오는 석유는 영국 정부 재정에도 도움이 되었다. 오일쇼크 이후 많은 국가들이 에너지 수입 비용 증가로 무역수지와 재정에 부담을 느꼇지만, 영국은 북해 유전을 통해 일정 부분 충격을 완화할 수 있었다.
물론 1970년대 영국은 여전히 높은 인플레이션, 노동쟁의, 제조업 경쟁력 약화라는 문제를 겪고 있었다. 하지만 북해 유전은 영국이 중동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자립도를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독일 – 에너지 효율과 녹색 전환의 씨앗
당시 서독은 제조업 강국이었지만, 에너지 자원은 충분하지 않았다. 석유 가격이 급등하면 독일 기업들의 생산비도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자동차, 기계, 화학, 철강 같은 산업은 에너지 비용 변화에 민감했다.
독일은 이 문제를 에너지 효율과 기술 개발로 풀어가려 했다. 건물의 단열 기준을 강화하고, 산업 현장의 에너지 사용을 줄이는 정책을 추진했으며, 장기적으로는 재생에너지와 친환경 기술에 대한 관심도 커지기 시작했다.
“에너지를 외부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산업 경쟁력과 국가 안보가 흔들릴 수 있다” 이 문제의식은 이후 독일의 에너지 효율 정책, 재생에너지 확대, 환경운동, 녹색당의 부상과 연결된다. 즉 독일에게 오일쇼크는 당장의 경제 충격이었지만, 동시에 훗날 친환경 산업과 에너지 전환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되었다.
- 대한민국 – 중화학공업화
대부분의 국가는 오일쇼크 이후 에너지 비용 증가로 산업 투자를 조심스럽게 가져갔다. 하지만 한국은 오히려 중화학공업화를 밀어붙였다.
당시 한국은 선진국도 아니었고, 에너지 자원도 부족한 국가였다. 석유 가격이 오르면 수입 비용이 커지고 무역수지에 부담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철강, 조선, 석유화학, 기계, 전자, 비철금속 등 6대 전략산업을 중심으로 산업 구조를 고도화하려 했다.
정부는 특정 산업과 기업에 금융, 세제, 정책 지원을 집중했고, 해외 차관과 기술 도입을 활용해 대규모 설비 투자를 진행했다.
포항, 울산, 창원, 여수 같은 산업도시가 이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철강은 조선과 자동차, 기계산업의 기반이 되었고, 석유화학은 플라스틱과 화학소재 산업의 토대가 되었다. 조선업은 이후 핵심 수출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한국의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는 오늘날 한국 제조업의 기반을 만든 동시에, 재벌 중심 경제구조와 대외의존도라는 숙제도 함께 남겼다.
- 산유국 – 오일머니의 시대
유가가 급등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같은 중동 산유국들은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기 시작했다. 이 돈을 흔히 오일머니, 또는 석유달러라고 부른다.
산유국들은 이 돈으로 도로, 항만, 공항, 도시 인프라를 건설했다. 사막 위에 현대적인 도시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왕정국가들은 석유 수입을 바탕으로 복지와 보조금, 대규모 개발 사업을 확대했다.
오일머니는 산유국 내부에만 머물지 않았다. 막대한 석유달러는 서구 금융시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산유국들은 벌어들인 돈을 미국과 유럽의 은행에 예치했고, 서구 은행들은 이 돈을 다시 개발도상국에 대출해주기 시작했다.
이 흐름은 이후 세계 금융시장을 크게 바꿔놓는다. 국제 은행들의 영향력이 커졌고, 개발도상국들은 더 쉽게 외채를 끌어올 수 있게 되었다.
당장은 돈이 넘쳐나는 것처럼 보였지만, 훗날 미국이 금리를 급격하게 올리자 이 부채는 큰 문제가 된다. 특히 멕시코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외채위기는 이 석유달러 재순환 구조와 깊게 연결된다.
- 2차 오일 쇼크까지
오일 쇼크 이후 각 국은 오일쇼크에 발맞춰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인플레이션이 쉽게 잡히지 않았다. 1차 오일쇼크의 충격이 지나간 뒤에도 물가 상승 압력은 계속 남아 있었다. 기업과 노동자들은 앞으로도 물가가 오를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기대심리는 임금과 가격에 반영되었다.
미국 정부와 연준은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닉슨 행정부는 가격 통제를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포드 행정부는 WIN 캠페인을 외쳤지만 물가를 잡지 못했다. 카터 행정부에서도 경기와 물가 사이의 딜레마는 계속되었다.
중동 정세는 여전히 불안했다. 욤 키푸르 전쟁은 끝났지만,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의 갈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여기에 이란 내부의 정치적 불안까지 커지기 시작했다.
이란은 팔레비 왕조 아래에서 친서방 노선을 걷고 있었고, 미국의 중요한 중동 파트너였다. 동시에 이란은 대규모 원유 생산국이자 수출국이었다. 이란의 정치적 안정은 곧 세계 석유 공급의 안정과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이란 내부에선느 불만이 커져나갔다. 팔레비 왕조의 급격한 서구식 근대화는 일부 계층에는 성장과 번영을 가져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빈부격차와 정치적 억압, 종교 세력의 반발을 키워갔다.
이슬람 성징자와 반정부 세력은 점차 결집했고,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한 혁명 세력은 팔레비 왕조에 대한 저항을 확대해갔다.
세계 경제는 아직 1차 오일쇼크의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는데 1979년 중동에서는 이란 혁명이 시작됐다.
1979년 이란 혁명은 세계 석유 시장에 다시 한 번 충격을 주었다. 이란의 정치적 혼란으로 원유 생산과 수출에 차질이 생기자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단순히 공급량이 줄어든 것뿐 아니라 “중동 석유 공급이 다시 흔들릴 수 있다”는 공포가 유가를 끌어올렸다.
1차 오일쇼크 이후에 인플레이션은 완전히 잡지 못하고 있었고 산유국의 정치적 불안, 원유 공급차질, 투기적 수요,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가 겹치면서 유가는 다시 급등하기 시작했다
이는 2차 오일쇼크의 서막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