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 쇼크 1부 (1차 오일쇼크)

History doesn’t repeat itself, but it does rhyme – Mark Twain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 않지만, 그 운율은 반복된다”

  • 전쟁의 발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서유럽, 일본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경제성장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다.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세계 경제는 에너지를 기반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어왔고, 특히 20세기 들어 석유는 현대 산업사회의 핵심 연료가 되었다. 서구 선진국들은 저렴하고 안정적인 중동산 석유를 활용해 높은 성장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욤 키푸르 전쟁’이 발발했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이후 주변 아랍 국가들과 계속 충돌해왔다.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와 이스라엘의 영토 확장은 주변 아랍 국가들의 분노를 키웠고, 이집트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아랍 국가들은 그런 이스라엘을 견제하기 위해 군사적 대응을 준비했다

1973년 10월, 이집트와 시리아는 유대교의 중요한 명절인 욤 키푸르에 맞춰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했다. 이 전쟁이 바로 제4차 중동전쟁 욤 키푸르 전쟁이다.

초반에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기습 공격이 효과를 거두며 전황을 유리하게 끌고 갔다. 그러나시간이 지나면서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고, 전쟁은 단순하게 중동 지역 분쟁을 넘어 아닌 미국과 서방 vs 아랍 산유국의 대립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랍 국가들은 전쟁의 흐름 속에서 석유를 전략적 무기로 사용했다. 이들은 매달 원유 생산량은 5%씩 줄이겠다고 발표했고, 미국과 네덜란드 등 이스라엘을 강하게 지원하는 국가들에 대해서는 석유 수출 금수 조치를 단행했다.

그 결과 국제 유가는 몇 달 사이 배럴당 3달러 수준에서 12달러 수준까지 치솟았다. 약 4배에 가까운 급등이었다.

당시 세계 경제는 석유 의존도가 매우 높았다. 석유는 자동차 연료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공장, 전력, 운송, 항공, 해운, 화학제품, 플라스틱, 비료 생산까지 현대 경제의 거의 모든 영역에 석유가 들어가 있었다. 따라서 국제 유가의 급등은 경제 시스템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에서부터 모든 가격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 세븐 시스터즈와 그 이전의 세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석유 산업의 중심은 미국이 있었다. 특히 펜실베니아, 텍사스, 캘리포니아 등에서 석유가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미국은 세계 최대 석유 생산국이자 소비국이였다

그로 인한 미국의 경제는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자동차, 항공,군수,화학,전력 생산 등 석유의 소비 또한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그로 인해 1970년부터 미국의 원유 생산이 감소될 것이라는 예측 석유회사들은 더 크고 저렴한 유전을 찾아 중동으로 향했다.

그 당시 석유 회사들은 세븐 시스터즈라고 불렸고 당시의 Exxon, Mobil (현재의 엑슨모빌), Chevron, Gulf Oil, Texaco, Royal Dutch Shell(Shell), Anglo-Iranian Oil Company/Anglo-Persian Oil Company(BP) 7개의 기업이 석유 탐사, 유전 개발, 생산, 정제, 운송, 판매, 가격 결정까지 석유 산업의 전 과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1928년 레드라인 협정으로 중동 석유 개발권을 석유회사들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질서를 만들었고, 같은 해 스코틀랜드에서 아크나캐리 협정은 국제 석유 카르텔 형성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세븐 시스터즈는 중동 산유국 정부와 장기 개발권 계약, 즉 컨세션을 맺었고 서구 석유회사들은 석유를 개발하고 판매해 막대한 이익을 가져갔고, 산유국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로열티와 세금만 받아가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중동 국가들은 이 컨세션에 불만을 갖기 시작했고, 1951년 이란의 모사데크 정부는 영국계 석유회사 BP의 지배를 받던 석유산업을 국유화하려 했지만 미국과 영국의 개입 속에 좌절되었다.

이를 이란의 석유 국유화 시도라고 불리며, 이는 중동 산유국들에게는 매우 큰 상징이 되었고 그 이후 1960년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베네수엘라는 OPEC을 설립해 세븐 시스터즈에 집단 대응을 시작했다

  • OPEC vs 세븐 시스터즈

1973년 제1차 오일쇼크 이전의 경제는 경기에 따라 물가가 내려가고 올라갔지만 오일쇼크 이후에는 경기도 나쁘고 물가도 계속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아랍 산유국들은 석유 생산과 수출을 정치적 무기로 사용했고, 국제 유가는 단기간에 폭등했다. 이 사건은 세븐 시스터즈가 장악하던 석유 시장의 질서가 OPEC과 국영석유회사, 산유국 정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즉 오일쇼크는 단순한 유가 상승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석유 시장의 권력이 서구 석유 메이저에서 산유국으로 이동한 사건이었고, 동시에 세계 경제가 에너지 가격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 경제 시스템의 혼란, 스태그플레이션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선진국들은 케인즈주의적 정책에 의존해왔다.

경기가 나빠지면 정부가 재정을 확대하고 공공투자를 늘려 수요를 살리는 방식이었다. 고도성장기에는 이런 정책이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했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오일쇼크 이후에 경제 시스템은 전혀 다른 구조로 흘러갔다. 1차 오일쇼크로 국제 유가가 4배가 상승하자 생산비,원재료,운송비,인건비 등 세계 경제 전체의 물가가 맞춰 상승하고 있었다.

기업 입장에서는 생산비가 급격하게 올라갔고 또 내년에도 올라갈거라는 기대인플레이션까지 팽배해지자 제품 가격을 올리기 시작했고 소비자는 이미 국제 유가가 올라 교통비, 난방비도 상승한 마당에 제품 가격도 올라가자 소비를 줄이기 시작했고 경기는 지속적으로 안좋아지는데 물가는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시작했다.

그 당시 닉슨 행정부는 금리보다는 가격 통제에 힘을 가했고 통화긴축보다는 기업에게 가격과 임금을 마음대로 올리지 말라고 통제했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볼 수 없었다. 이 당시 연준 의장은 아서 번스였고 번스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부분을 걱정하면서도 정치적 압력에 굴복해 금리를 인하했다 (

그 외에 닉슨 행정부때는 베트남전 비용 문제와 복지 지출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와 달러 약세등의 복합적 요인으로 인플레이션과 기대 인플레이션을 꺾는 데 실패했다

그 후 포드 행정부는 Whip Inflation Now 캠페인을 외쳤는데, 이는 정부만이 아닌 국민 전체가 인플레이션과 싸워야 한다는 내용이였다.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에너지를 절약하고 기업은 가격 인상을 자제하자는 메시지를 던졌다.

1974년 말에서 1975년으로 넘어가면서 미국 경제는 더욱 침체에 빠졌다. 실업이 늘고 기업 활동이 둔화되자 경기부양도 필요해졌다. 긴축과 절약을 강조했지만 이후에는 경기 회복을 위해 세금 환급과 기업 투자세액공제 같은 부양책을 추진하게 된다. 즉 포드 행정부는 스테그플레이션 안에서 뚜렷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카터 행정부에도 문제는 계속되었다 1978년 카터는 G.윌리엄 밀러 (G.William Miller)를 연준 의장에 임명했다. 밀러는 인플레이션에 강경하게 대응하기보다는 경기와 고용을 더 신경 쓰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1979년 이란 혁명이 발생하면서 제2차 오일쇼크가 터졌고, 유가는 다시 급등했다. 인플레이션은 더욱 심각해졌고, 시장은 미국 정부와 연준이 과연 물가를 잡을 의지가 있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카터 대통령은 1979년 폴 볼커를 연준 의장에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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